“지금 힘든 게 너뿐인 줄 아냐”, “나때는 어땠는 줄 알아?”

늙은이, 기성세대를 뜻하는 ‘꼰대’라는 단어는 어느덧 우리 시대의 조류를 반영하는 상징이 됐다. 본래 꼰대의 의미는 젊은 층이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켜 사용하는 은어였으나, 최근에는 자기의 지위를 이용하여 손아랫사람을 무례하게 대하거나 자기가 가진 사고방식을 함부로 강요하는 사람으로 확장되어 쓰이고 있다.

이러한 의미변화(Semantic Change)는 용어의 지칭 대상을 자연스럽게 일부 층에서 전 연령층으로 확대시켰다. ‘꼰대질’ 또한 대면적인 관계에서 특정 행위를 뜻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현상이자 밈(meme)이 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말이다.

그러나 특정 행위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진 이 밈은 ‘자기도 꼰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모종의 불안감을 기저한다. 이 불안은 대면적인 관계에서의 끊임없는 자기검열과 상호 간의 소통 단절을 유발한다. 결코 좋은 현상이라고 볼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 일각에서는 ‘역꼰대’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꼰대를 거부하는 꼰대’라는 의미를 가진 이 용어는 지나친 꼰대 낙인으로 인한 소통 단절에 반발하며 등장한 것이다.

필자 역시 역꼰대 현상에 대해 달가운 입장은 아니다. 조금 더 먼저 겪어보고 넘어져 보기도 했던 연장자만큼 젊은 층에게 실질적인 가르침을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소통 거부의 일종인 역꼰대 현상은 정서 단절을 낳을 뿐만 아니라, 젊은 층이 검증된 멘토를 찾을 기회마저 잃게 만들 수 있다.

누구보다 멘토를 갈망하는 청년 세대

그런데 사실 젊은 층은 조언 그 자체를 거부한 적이 없다. 오히려 이들은 끊임없이 멘토(mentor)와 삶의 가이드라인을 갈망해왔다.

하루가 멀다 하고 끊임없이 변하는 물질적 토대는 어느덧 4차 산업까지 목전에 두고 있고, 심지어 이제는 100세 시대라고 한다. 의료기술이 발달하고 근로환경은 갈수록 개선되는 오늘날 젊은 층은 과거처럼 굶어 죽거나 병으로 객사할 걱정보단, 오히려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사회적 가치를 도태시키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모종의 불안감을 안고 산다.

해답이 부재하고 혼란이 메인이 된 격동기의 한 가운데에서, 자신이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특별하지 않다는 걸 잘 아는 이들은 ‘삶의 가이드라인’을 그 무엇보다 갈망한다는 뜻이다.

가령 ‘YOLO(You only live one)‘라는 단어를 보자. “인생은 한 번 뿐이니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는 의미의 이 단어를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큰 오산이다. 젊은 층이 욜로를 외치는 건 인생 걱정이 없다는 뜻도 아닐 뿐더러 제 멋대로 막 살겠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이는 오히려 당연하게 취급받아오던 사고방식과 인식틀이 더 이상 자기 삶에 쓸모없어졌다고 느꼈기 때문에 나타나는 주류 문화에 대한 반발 현상에 가깝다.

욜로에서 읽을 수 있는 청년들의 거부감은 삶의 조언 그 자체가 아니다. 시대를 읽는 능력도 좋아 보이지 않고, 설득력과 진심이 없이 무조건 구시대 사고방식에 집착하는 ‘선민의식’을 거부할 뿐이다. 젊을 때 이것저것 시도해보라며 폼 내던 사람이 막상 뭔가를 시작하려는 손아랫사람에게 “네까짓 게?” 식으로 나오는 모순적인 모습, 고등학생도 느낄 법한 삶의 철학을 마치 숭고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마냥 유세부리는 모습 등에서 선민의식, 아니 ‘심술’을 읽은 것이다.

멘토와 꼰대의 차이가 대체 뭔지 짜증스럽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 또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으로써 그 기준을 말하는 건 매우 건방진 태도가 아닐까 한다.

다만 한 가지 확신을 갖는 부분은 있다. 정치적 스탠스를 떠나서 이외수를 따르던 청년들과 조던피터슨을 따르는 청년들은 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제각기 삶의 지혜를 터득해가는 방향성과 방법론에 소소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결국 그들도 멘토와 삶의 가이드라인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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